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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문학인, 역사학자, 투사의 길을 한 몸으로 감당하다 [신채호]
고영(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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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요구한 일인 다역을 감당하다 단재 신채호^1880~1936년의 삶과 활동을 몇 문단으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열정이 넘치는 언론인이었고, 문학가였고, 역사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 전체를 완강한 항일 독립운동 아래 일치시켰던, 타협을 모르는 투사였습니다. 신채호는 그의 나이 스물다섯, 한창 젊음이 끓는 시절에 을사늑약^1905년이 맺어져,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꼴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5년 뒤 1910년에는 조선이 국권을 완전히 잃고, 일본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 경술국치^{국권 피탈}까지 겪어야 했습니다.⁰¹ 그는 왕, 양반, 평민으로 확연히 구분된 봉건제의 모순에 가득 찬 조선이,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입으로 참담한 위기를 겪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신채호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웠습니다. 그가 겨레를 위해 펼친 활동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먼저 신채호는 언론인으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신분, 전통, 관습에 얽매여 사는 겨레를 각성시키고, 애국심을 일깨우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글을 썼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황성 신문〉에서였습니다. 신문사 기자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미 명예로운 관직인 성균관 박사가 되었지만,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관직보다는 민중과 함께 호흡할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 뒤 〈황성 신문〉이 일제 침략을 강하게 비판하다 무기 정간⁰²을 당하고 나서는 〈대한 매일 신보〉의 주필⁰³이 되어 다시금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글을 썼지요. 외세에 맞서고, 역사의식을 불어넣은 그의 언론 활동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감옥에 끌려가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집니다. 역사 연구에서도 신채호의 위상은 우뚝합니다. 신채호는 근대적인 역사학 이론을 연구해, 본격적인 우리 역사학의 앞날을 열었습니다. 또한 일본 관학자⁰⁴들이 의도적으로 조선 고대사, 당대사를 깎아 내리는 데 맞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학을 모색했지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한 점도 눈에 띕니다. 신채호는 글로든 직접 행동으로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봉건제 및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습니다. 문학가 신채호 앞서 보았듯 신채호는 일인 다역을 감당하며 목숨을 걸고 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문학가적인 면모에 집중할까 합니다. 신채호는 12편의 소설과 4편의 전기, 그리고 33수의 시와 수많은 평론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문학 활동은 곧 반봉건 및 반제국주의 투쟁과 한길에서 만나게 마련이었습니다. 그의 곧은 의지를 잘 드러낸 시 한 편을 먼저 볼까요? 한 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주먹 덥석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하리. 이 시는 신채호가 중국으로 망명한 직후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에서 보이는 강렬한 인상, 핏빛 상징은 읽는 이를 섬뜩하게 하는 구석까지 있지요. 너와 나, 곧 겨레와 나의 사랑은 깊디깊습니다. 그런데 여기 깊은 사랑을 베려는 칼이 있네요. 겨레와 나를 갈라놓는 외세의 침략을 빗댄 것이겠지요. 이 칼끝에서 뿜어진 피는 ‘나’와 겨레가 흘린 패망의 피일 테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를 투쟁의 피로 돌려야 합니다. 어려움을 딛고 서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겨레와 내가 외세에 패배해 흘린 희생의 피를 ‘한주먹 덥석’ 쥐더니 기어이 회생⁰⁵의 피로 승화시킵니다. 어느 새 이 피는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언젠가 ‘봄맞이’를 할 수 있다는 선명한 희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한나라 생각」에 보이는 파격적인 표현은 이전 한국어 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것들입니다. 전에 없던 파격이기에 낯설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의지가 어떤 시를 낳을 수 있는지를 이렇듯 잘 보여 주는 예도 드물 것입니다. 사막에서 큰 바람 맞으며 신채호의 또 다른 작품 「금강산」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입니다. 이 시는 우리가 늘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곳에서 파격을 보여 주지요. 금강산 금강산 좋다 마라 단풍만 피었더라 단풍 잎새 잎새 추색(秋色)만 자랑터라 차라리 몽고⁰⁶ 대사막에 대풍(大風)을 반기리라 금강산은 누구나 아름답다고 기리는 명산입니다. 그런데 이 시 속의 금강산은 몽골의 대사막과 대립되는 상징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금강산이 정적이라고 하면, 대사막은 동적입니다. 정체한 금강산은 시들어 가는 가을색을 품고 서 있을 뿐입니다. 이에 견주어 대사막은 큰 바람을 품을 줄 압니다. 금강산이 나약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대사막은 풍채가 좋고 당당하며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시대에 맞서 죽음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채호의 선택이 몽골의 대사막을 향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나아가 내 발걸음이 대사막과 같은 거친 길에 접어들지라도, 그곳에서 큰 바람과 같은 고난을 온몸으로 겪더라도, 가을 풍경의 쓸쓸함보다는 ‘차라리’ 그 고난의 길을 택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합니다. 독립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그러나 신채호의 의지와 투쟁은, 뜻한 바를 마음껏 이룬 적이 없습니다. 가장 큰 좌절은 임시 정부 안에서 있었습니다. 신채호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임시 정부에 참여했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 통치를 청원⁰⁷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크게 실망합니다.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이승만과 독립 운동의 방향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신채호는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 통치가 미국 또는 중국 국민당 정권에 의존하는 것이고, 독립 투쟁을 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대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장 독립 투쟁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합니다. 1923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새로운 임시 정부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이마저 소련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이즈음 신채호는 “이역⁰⁸ 땅 생활 십 년 만에 수염은 허옇게 되고 / 깊은 밤 병석에 달빛이 비쳐 든다”는 시구를 쓰기도 하지요. 그러나 현실적인 고통을 맞닥뜨리면서도 신채호는 이두⁰⁹, 『삼국사기』, 묘청의 난 등에 관한 연구를 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독립 투쟁 사상 가장 빛나는 무장 투쟁을 벌인 의열단과 그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 혁명 선언」을 쓰기도 했습니다. 의열단과 김원봉을 만나고, 또 각지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신채호는 불교,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여러 사상을 섭렵하게 됩니다. 1927년에는 아나키즘 단체에도 가입하지요. 사실 현실 속에서 어떤 방편을 택하든, 신채호의 마음은 겨레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겨레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못 만날 사람이 없었고, 사상을 가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이렇게도 선명한 단심을 지니고 애쓰던 신채호. 그는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중국 랴오둥 반도에 있는 뤼순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1936년, 감옥의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진 뒤 사흘 만에 혼자 숨을 거두었습니다. ⁰¹조선과 일본의 병합을 위한 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맺어져 8월 29일 공포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1910년 8월 29일을 ‘나라의 수치스러운 날’이라는 뜻에서 ‘국치일’이라 한다. ⁰²무기정간 감독관청의 명령으로 신문, 잡지 따위의 정기 간행물의 발간을 무기한으로 중지하는 것. ⁰³주필 신문사나 잡지사 따위에서 행정이나 편집을 책임지는 사람. ⁰⁴관학자 국가(여기서는 일제)에서 세운 학교나 학원 따위의 교육 기관에서 연구하는 사람. ⁰⁵회생 거의 죽어 가다가 다시 살아남. ⁰⁶몽고 몽고는 중국인들이 몽골을 비하해 부르는 말. 지금은 몽골 사람과 몽골 역사를 존중해 ‘몽골’이라고 쓴다. ⁰⁷청원 일이 이루어지도록 청하고 원함. ⁰⁸이역 본고장이나 고향이 아닌 딴 곳. ⁰⁹이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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