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스캔들을 남긴 삶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인 임제1549~1587년가 벼슬아치로 있을 때입니다. 마침 평안도로 발령이 난 임제는 서울을 떠나 송도개성의 옛 이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송도를 지나는 김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묘를 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읊었지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01을 어디 두고 백골02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황진이라는 한 여성의 죽음이 얼마나 원통했던지, 임제는 이처럼 간절한 추억과 애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임제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지요. 조선의 문인이 기생에게 시까지 지으면서 애도를 표하다니! 당시의 벼슬아치와 양반들은 임제가 신분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며 비난을 퍼부었어요. 그러자 임제는 오히려 이때다! 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방랑에 나섰답니다. 임제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황진이와 한 번 얽힌 뒤, 영영 벼슬길로 돌아오지 않고 여행, 시, 술에 빠져 살게 되었지요. 스캔들이라 해도 정말 멋진 스캔들 아닌가요.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삶
출생부터 행적, 심지어는 이름까지 황진이에 대한 기록은 어느 것 하나 변변치 않습니다. 기생이 되어 받은 이름기명은 ‘명월’이라고 하는데요, 그나마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황진이가 남긴 작품과 짤막한 기록, 나중에 정리된 야담 등을 통해 그 삶을 재구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황진이는 조선 명종조선 제13대 왕 때쯤 기생으로서 이름을 날린 여성입니다. 송도에서의 고사를 보면 송도 출신이 틀림없어 보이고,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진이는 황 진사의 서녀03라고도 합니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천인 또는 눈이 먼 여성이라는 설이 있지요.
어른이 되어서 남긴 황진이의 이야기는 남다릅니다. 그가 열다섯 살 때 일입니다. 이웃의 한 젊은 선비가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병으로 죽고 맙니다. 운구 행렬이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날 때 말이 슬피 울며 꿈쩍하지 않자, 황진이는 자신의 속적삼04으로 관을 덮어 줍니다. 그러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지요. 이런 일이 있은 뒤 황진이가 기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웃 젊은이를 한눈에 반하게 한 매력은 기생이 되어서 더욱 그 빛을 발한 모양입니다. 황진이는 화장을 별로 하지 않고도 다른 기생의 용모를 압도했다고 하지요. 게다가 가야금, 노래, 글쓰기에 모두 능해 남다른 분위기를 뽐내며 많은 귀족, 학자, 벼슬아치들과 널리 사귀었던 듯합니다.
앞서 본 임제의 시는 황진이 삶의 한 면을 잘 보여 줍니다. 임제 또한 남 못잖은 자유로운 언행으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준 개성 넘치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인물로 하여금 추억과 애도의 시를 쓰게 했으니 황진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이 되지 않나요? 황진이는 서경덕1489~1546년과도 교분05을 나누었습니다. 서경덕은 이황, 조식과 함께 조선 성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학자로 손꼽힙니다. 황진이는 당시 송도에서 이름난 스님 지족선사를 파계06시키고, 대학자 서경덕마저 유혹하려고 했다지요. 그러나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구 또는 사제 사이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해요. 그 뒤로 후대 사람들은 서경덕, 박연 폭포07, 황진이를 묶어서 송도삼절, 곧 ‘송도에서 가장 빼어난 세 존재’로 일컬었다고 합니다.
송도삼절에 깃든 뜻
송도삼절에 얽힌 일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황진이가 자신의 개성과 매력을 얼마든지 뽐내며 살았다는 해석도 가능하고요, 불교든 유학이든 어떤 분야에서도 그녀의 교양이 높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보통 장엄함이나 범접하기 힘든 존재를 상징하는 폭포가 황진이에게 빗대어진 점도 남다릅니다. 그는 개성과 매력을 도학08의 이름으로 억압하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한 여성이 원하는 남성과 얼마든지 사귄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자신이 가진 개성과 매력을 자유롭게 내보이되, 그 마음 밭에는 굳은 심지를 세운 삶……. 황진이는 실로 그렇게 살다 간 여성이었던 듯합니다. 그것도 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이루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한 삶 말입니다. 황진이가 남긴 이 시가 혹 그의 속내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한 줄기 긴 하늘을 바위 끝에 뿜어내니
백 길이나 되는 폭포수 물소리 우렁차구나
힘찬 물줄기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워 흰 무지개 뚜렷하네
― 황진이, 「박연 폭포」의 첫 수 ―
작품 속에 담긴 삶
이제 황진이의 삶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 그가 남긴 작품들을 더 살펴볼까요?
반달을 읊다
그 누구 곤륜산의 옥을 잘라 내어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을까
견우가 한 번 떠나 버린 뒤
저 푸른 허공에 수심 겨워 던졌지
견우와 직녀는 한 해에 칠월 칠석 딱 하루 만나고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전설의 연인이지요. 황진이는 늘 그리운 삶을 살았는지 몰라요. 자유로운 세상이 그립고, 제대로 된 사귐이 그립고, 스스로 충만한 삶이 그리웠겠지요. 황진이가 보기에 저 하늘의 반달마저 삶의 상념09을 비추는 듯했던 모양이지요. 견우와 헤어진 직녀가 에잇, 하고 얼레빗을 내던지는 마음과 황진이의 마음을 한 번 견주어 보세요.
이번에는 ‘기나긴 밤’의 허리를 베어 내겠다는 재치 가득한 시조를 볼까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지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선인 동지선에 이르는 때로, 이때 적도 이북에서는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집니다. 화자는 동짓달 긴긴 밤을 조금 잘라서 봄바람처럼 향긋하고 따스한 이불에 간직했다가, 사랑하는 이가 오면 그 밤을 꺼내서 이어 가겠다고 했어요. 밤을 저축했다가 쓰겠다는 상상력뿐 아니라, ‘서리서리’, ‘굽이굽이’와 같은 의성어를 마침맞게 배치하는 재치를 보세요. 서리서리, 굽이굽이가 황진의 소망을 이루어 줄 주문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그는 사랑과 사람을 향한 마음을 이처럼 멋지게 표현해 냈지요.
어져10 내 일11이야 그릴12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 했다면 갔을까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가 가진 것은 폭포의 결기13, 반달의 상념, 동짓달 밤을 간직하는 재치뿐이 아닙니다. 황진이는 자신에게도 이렇게 솔직했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일을 저질러 놓고 ‘그리워할 줄 몰랐느냐’며 자책합니다. 화자는 곁에 두고 싶은 이를 ‘나와 함께 있어요!’라는 솔직한 말로 붙잡지 않았던 게지요. 그랬더니 그가 굳이 떠나갔네요. 떠나간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 사람의 사내일까요? 또는 높디높은 데다 가슴 벅차기 이를 데 없는 박연 폭포처럼 사느라 떠나보낸, 삶의 모든 인연일까요? 아무튼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스스로를 ‘폭포’에 견주었던 황진이에게도 이런 회한14이 있었네요.
다시 전해 오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황진이는 죽기 전에 자신이 원래 활기차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산에 묻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달라고 했답니다. 또 자신의 상여가 나갈 때에는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울리며 운구를 인도하라고 당부했지요. 황진이는 생년월일도 사망일시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렇게 영화 같은 일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한 신분에 묶여 살았지만, 음악으로 문학으로 신분 밖 세계를 훨훨 날다 갔습니다.
01홍안
붉은 혈색이 감도는 젊은 사람의 건강하고 말끔한 얼굴.
02백골
사체에 붙은 살이 썩고 남은 뼈.
03서녀
첩의 딸.
04속적삼
저고리나 적삼 속에 껴입는 적삼. 저고리에 땀이 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입음.
05교분
서로 사귄 정.
06파계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
07박연폭포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에 있는 폭포. 근처의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꼽힘. 또 금강산의 구룡 폭포, 설악산의 대승 폭포와 함께 한국의 3대 명폭포 가운데 하나.
08도학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
09상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
10어져
회한의 뜻을 담은 감탄사.
11내 일
나의 일, 내가 한 일.
12그리다
‘그리워하다’의 옛말.
13결기
곧고 바르며 과단성 있는 성미.
14회한
뉘우치고 한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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